개요 내용 원불교에서의 의미
개요
성품을 본다는 의미 또는 도를 깨닫는다는 말로 오도(悟道)라고도 한다. 흔히 불교 선종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에서 견성을 말한다. 견성이란 자각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본래 가지고 있는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보는 것, 참 자기를 알게 되는 것,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란 뜻이다.
내용
선가(禪家)에서는 견성을 일대사라고 하여 수행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다. 견성이란 말은 보리달마의 저작으로 알려진 《혈맥론》에 처음 이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를 설명하기를 “만약 부처를 구하려거든 모름지기 성품을 보라(見性). 성(性)은 곧 부처이다. 만약 견성을 못하면 염불ㆍ송경ㆍ지계ㆍ보시 등은 모두가 이익이 없다. 염불은 인과를 얻고, 송경은 총명을 얻고, 지계는 생천을 얻고, 보시는 복을 얻을 뿐 부처를 구함에는 아직 따르지 못한다. 만약 자기를 밝게 요달하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계정혜 삼학을 겸비한 선지식을 찾아서 생사의 근본을 궁구하라. 견성을 못하면 가령 십이부경을 통설할지라도 생사윤회를 면치 못한다. 삼계에 고를 받아서 벗어날 기약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선 부처가 되려면 견성을 해야 한다. 견성을 못한 사람은 다른 선(善)의 행위가 있어도 선의 과보는 얻을 수 있지만, 삼계를 벗어나는 인(因)을 얻지 못했으므로 진정한 불도는 아니다. 참다운 불도는 진정한 자성을 보는 데 있다. 자기 마음이 부처이며 부처는 자기 마음이다. 달마는 마음 밖에 부처는 없다(自心是佛 佛是自心 心外無佛)라고 말했다. 부처를 구하려거든 견성하라. 만약 견성을 못하면 평생을 밖을 향하여 치달릴 뿐 부처를 구해도 얻지 못한다. 이 말은 선(禪)의 종지를 철저히 표현한 말이다.
특히 육조혜능에 이르러 이 견성이 근본사상이 되어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견성이란 글자 그대로 성품을 본다는 말이다. 그래서 혹 성을 우리의 신체 내에 어떤 고정적으로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몸에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찾으려 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견성의 실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달마는 《오성론》에서 마음이 텅 빈 것(心是空)을 아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 것(見佛)이라고 말했다.
다시 정해정견(正解正見)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 정견을 얻은 이는 마음이 공하여 없는 줄을 알아서, 미함과 깨달음(迷悟)을 초월한다”. 곧 깨달음도 없고 깨닫지 못함도 없는 데를 정해정견이라 했다. 그래서 진견(眞見)이란 보지 못하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이 보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이 본다고 하는 견해를 갖는데, 여기에서 본다는 것은 자기의 마음 가운데 경계가 생겨 본다는 의식이 생기는 것인데, 이것은 범부의 소견이요 망상이다. 안으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밖으로 경계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마음과 경계 둘이 다 깨끗하게 보는 것을 진견이라 하고, 이러한 이해가 생길 때를 정견이라고 한다.
우리가 본다든가 보인다든가 하는 것은, 자기의 마음과 마음의 상대인 모든 사물에 대한 상대적 생각으로 그것은 범부의 분별이고 망상인 것이다. 이 대립적 의식을 버리고 초월적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 견성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라든가 경계라든가 미함이라든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일체의 분리의식 곧 능소(能所) 주객(主客) 등의 분별적 대경(對境)이 있을 때는 견성에 이르지 못한 때다. 그러므로 견성이란 모든 대립적 의식을 다 부수어서 시비ㆍ선악ㆍ미오ㆍ범성ㆍ천당과 지옥ㆍ번뇌와 보리ㆍ생사와 열반이라는 분별적 견해를 모두 제거하여 본래 한 물건이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원불교에서의 의미
원불교에서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견성을 매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견성을 못하고서는 원불교의 수행계위인 법강항마위에는 승급하지 못한다고 했다(《대종경》 변의품34).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무조건적으로 견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견성 이후 성불을 중요시하고 있는데, 이를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려는 것은 성품의 본래 자리를 알아, 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나니, 만일 견성만 하고 성불하는데에 공을 들이지 아니한다면 이는 보기 좋은 납도끼와 같아서 별 소용이 없다”(《대종경》 성리품7)고 했다.
아울러 견성하는 공보다 성불에 이르는 공이 더 들고, 과거에는 인지가 어두운 고로 견성만 하면 곧 도인이라 했지만 돌아오는 세상에는 견성만으로는 도인이라 할 수 없으며, 대개의 수도인들이 견성만은 일찍 가정에서 마치고 성불을 위해 큰 스승을 찾아다니며 공을 들인다고 말하고 있다(《대종경》 성리품23). 견성을 원불교적 의미로 정리해 보면 일원(一圓)과 같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각자의 성품을 증득하여 보다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① 천지 만물의 시종본말과 인생의 생ㆍ로ㆍ병ㆍ사의 이치와 인과보응의 이치를 아는 것. 텅 빈 마음과 밝은 지혜로 천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줄 아는 것.
② 본래 그대로의 자기 본성을 보는 것. 참된 자기를 깨닫고 아는 일.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바른 해답을 얻는 것.
③ 자기의 마음속에 항상 정견(正見)을 가져 번뇌 망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金道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