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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천
[金幾千, 1890~1935]

주요약력 생애와 활동

주요약력

본명은 성구(聖久). 법호는 삼산(三山). 법훈은 종사. 1890년 2월 5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다유(多有)와 모친 김대유(金大有)의 아들로 출생. 소태산대종사의 최초 구인제자 가운데 한 사람.

생애와 활동

김기천 15세시에 김순천(金順天)과 결혼했으며, 17세부터 한문 서당 훈장으로 근동 아이들을 가르쳤다. 김광선의 인도로 소태산 문하에 귀의하여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에 동참했다. 1924년(원기9)부터 4년간 영광지부 서무부장 겸 지부장으로서 살림을 전담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익산총부 서무부장에 피임되어 2년간 근무했고, 1930년(원기15)에는 총부 교무부장, 이듬해에는 선원 교무로 해박한 지식과 명철한 지혜로 선원들을 일깨웠다. 김기천은 지혜가 출중하고, 수양력이 풍부하며, 계행이 청정하여 대중들로부터 존모를 받았고, 소태산으로부터도 ‘시비를 초월하고 희로애락에 끌리지 않는 부처’라는 칭찬을 받았다.

외관상으로 훌륭한 용모를 타고 났을 뿐 아니라 내적인 면에서도 인격・지식・덕행을 두루 갖춘 공심가요, 원만한 지도자로서 사표적 인물이었다. 1928년(원기13)은 김기천이 39세 되던 해, 하루는 소태산이 강당에 법좌를 차리라 하고 종을 쳐 대중을 불러 모은 뒤 “수도하는 사람이 견성을 하려는 것은 본래 자리를 알아, 그와 같이 결함 없게 심신을 사용하여 원만한 부처를 이루는 데에 그 목적이 있나니, 이는 목수가 목수노릇을 잘하려면 잣대가 있어야 하고, 용이 승천하려면 여의주(如意珠)를 얻어야 하는 것과 같다. 견성을 하려면 성리공부를 하여야 하나니, 성리는 내가 손을 내놔라 하면 손을 내놔야지 발을 내면 안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그대들에게 성리를 물어야겠다”하고 의두요목을 하나씩 놓고 물었다.

제자들이 차례로 대답은 하나 갈수록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마지막까지 대답한 사람은 김기천뿐이었다. 그가 성리 설하는 것을 듣고 소태산은 흡족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오늘 내가 비몽사몽간에 여의주를 삼산에게 주었더니 받아먹고 즉시 환골탈태하는 것을 보았는데, 실지로 삼산의 성리 설하는 것을 들으니 정신이 상쾌하다”며 이어 말하기를 “법은 사정(私情)으로 주고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저의 혜안이 열려야 그 법을 받아들이나니, 용은 여의주를 얻어야 조화가 나고 수도인은 성품을 보아 단련할 줄 알아야 능력이 나나니라” 이것이 새 회상이 생긴 이래 공식적으로 소태산이 제자에게 내린 최초의 견성 인가(認可)였다.

대중의 찬탄과 선망을 한 몸에 받으며 김기천은 견성 인가를 받았다. 우뢰와 같은 박수와 아울러 몇몇 여제자들은 벌떡 일어나 “우리 회상에 견성 도인 나셨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김기천은 주로 해탈 도리를 많이 설법했다. 소박한 화술, 간이 명백한 내용으로 교리 전반에 걸쳐 종횡 무진, 무애 자재, 사통오달로 법을 설했던 김기천은 문필에도 능해 많은 시문을 남겼다. 견성 인가를 받은 이후 후진들의 질의와 요청에 의해 초학자들의 교리에 바탕한 효과적인 한문 공부를 위해 《철자집(綴字集)》을 저술했고, 1933년(원기18)에는 교리 전반에 걸쳐 읊조린 의욕적인 장시(長詩) ‘교리송(敎理頌)’을 발표했고, 이어 ‘사은 찬송가’와 유명한 ‘심월송(心月頌)’을 남겼다.

심월송은 “저 허공에 밝은 달은 다만 한낱 원체로되 일천 강에 비치오면 일천 낱이 나타나고, 나의 성품 밝은 맘도 또한 한낱 원체로되 일만 경계 당하오면 일만 낱이 나타나니, 맘과 달이 둘이 오나 그 이치는 하나일세. 달 사랑하는 벗님네야 강 밑에 잠긴 달은 참 달이 아니오니 부디 그 달 사랑 말고 허공 달을 사랑하소”(《회보》 제24호). 그의 가사는 거의 전부 교리와 의식에 관한 내용을 읊었고, 산문은 자신의 수행과 관조에서 얻은 감각 감상들이다.

김기천이 후천 개벽에 관련된 의문을 소태산에게 질문한 내용이 《대종경》 변의품 32장이다. “김기천이 여쭙기를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후천 개벽의 순서를 날이 새는 것에 비유한다면 수운 선생의 행적은 세상이 깊이 잠든 가운데 첫 새벽의 소식을 먼저 알리신 것이요, 증산 선생의 행적은 그 다음 소식을 알리신 것이요, 대종사께서는 날이 차차 밝으매 그 일을 시작한 것이라 하오면 어떠하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럴 듯하니라” 했다. 김기천은 자신도 이미 하늘 이치와 인간 만사의 도리를 깨달았으나 자만함이 없이 대중살이 속에 모나지 않고 수선(修禪)에 힘썼으며 규율을 지키고 대중 앞에서 소태산에게 묻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보다 동지들의 미망을 타파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대종경》 변의품 34~37장의 다음 내용이 바로 김기천과 소태산이 주고받은 것이다.

“견성을 못한 사람으로서 정식 법강항마위에 승급할 수 있나이까” “승급할 수 없나니라.” “보통급에서 항마위에 오르는 공력과 항마위에서 여래위에 오르는 공력이 어느 편이 어렵나이까” “그는 근기에 따라 다르나니 혹 최상근기는 항마하면서 바로 여래위에 오르는 사람도 있고 항마위에 올라가서 오랜 시일을 지체하는 근기도 있나니라.” “수도인이 공부를 하여 나아가면 시해법(尸解法)을 행하는 경지가 있다 하오니 어느 위에나 승급하여야 그리 되나이까” “여래위에 오른 사람도 그리 안되는 사람이 있고, 설사 견성도 못하고 항마위에 승급도 못한 사람이라도 일방 수양에 전공하여 그와 같이 되는 수가 있으나, 그것으로 원만한 도를 이루었다고는 못하나니라. 그러므로, 돌아오는 시대에는 아무리 위로 천문을 통하고 아래로 지리를 통하여 골육이 분형되고 영통을 했다 할지라도 인간 사리를 잘 알지 못하면 조각 도인이니, 그대들은 삼학의 공부를 병진하여 원만한 인격을 양성하라.” “법강항마위 승급 조항에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어야 한다고 한 바가 있사오니, 과거 고승들과 같이 좌탈입망(坐脫入亡)의 경지를 두고 이르심이오니까.”, “그는 불생불멸의 진리를 요달하여 나고 죽는 데에 끌리지 않는다는 말이니라”.

김기천은 43세 되던 1932년(원기17)에 부산 하단지부가 창설되자 교무로 임명되었다. 정법으로 훈련받은 사람이 늘어나면서 교당의 토대가 점점 견고해졌다. 이어 부산 남부민동에도 김기천의 노력으로 수십명이 입교하여 교당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1935년(원기20)에는 그의 교화에 힘입어 정법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초량 등지에도 많은 사람이 입교하여 바야흐로 부산지방에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전망이 보였으나 우연히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부산 하단지부에서 1935년 46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그 당시 소태산은 서울에 머물며 금강산에 가기로 결정했었는데, 김기천이 위독하다는 병보를 듣고 즉시 총부로 돌아가 이재철을 문병차 부산으로 급파하는 한편 대중과 더불어 완쾌를 기원했으나, 열반의 비보를 받고서 “김기천은 나를 만난지 18년에 일호의 사심도 내지 않은 정진불퇴의 전무출신이요, 오직 희유의 공로자라 가는 기천이도 섭섭하려니와 우리의 한 팔을 잃었다”며 말을 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1935년 8월 9일에 열반했다. 〈宋仁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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