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약력 생애와 활동
주요약력
본명은 길홍(吉泓). 법호는 원산(圓山). 법훈은 대봉도. 1910년 3월 10일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에서 부친 기채(奇彩)와 모친 박도선화(朴道善華)의 5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1929년(원기14) 2월 22일 출가하여 불법연구회 상조부, 공익부 서기 및 출납원, 연구부장, 순교무, 총부교감 등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어린 시절부터 천성이 침착하고 어른스러웠다. 백부에게 양자가 되어 자랐다. 4형제의 조카 가운데 가장 총명하여 한학자이던 백부의 귀여움을 받았다. 서대원은 집에서 한학을 배우며 영광 백수 공립보통학교에 다녔고 법성 보통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서대원은 어렸을 때부터 음성이 맑았다. 후일 소태산도 “대원아 천도품을 읽어라. 너의 음성을 들으면 저절로 천도가 되는 것 같구나”라 했다. 서대원은 일찍이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진리에 대한 강한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929년(원기14) 조갑종의 권유로 소태산 법하에 귀의했다.
뛰어난 두뇌와 닦은 바 학식으로 멀리 해외로 나가 크게 활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외숙되는 소태산을 총부에서 뵙고 1개월 동안 동선(冬禪)을 마친 후 생각을 돌려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1929년(원기14) 1월, 20세시 농업부원으로 총부생활을 시작하여 그해 가을부터 서무부 서기로 전임되어 근무했다. 1931년(원기16)에는 입선(入禪)하여 전문훈련을 받은 후 상조부ㆍ공익부 서기와 출납원을 거쳐 연구부장ㆍ순교무ㆍ교감 등을 역임하면서 교단의 일에 전념했다. 특히 한문과 고경(古經)에 조예가 깊었던 서대원은 훗날 교단의 초기에 고경학습과 주해에 큰 몫을 담당했다.
1940년(원기25) 총부교감이 되어 각지를 순회하며 강습을 날 때는 맑은 음성으로 소태산의 법을 전하여 듣는 이마다 감동을 받았다. 주위에서 결혼을 권유하면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먼저 생사의 이치를 깨치어 자신을 제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며 결혼을 거부했다. 오도(悟道)의 집념이 강하고 법열에 차 있었던 서대원은 1941년(원기26) 32세에 수위단원이 되었다. 순실한 정남(貞男)으로 계행이 청정했으며 용모 또한 단정한 가운데 수양심을 증장시켰다. 소태산이 본교를 창립하면서 교법을 제정하고 사업을 일으키기에 하루도 쉴 새 없이 정력을 소비한 결과 병석에 눕게 되었다.
소태산의 모습을 지켜보던 서대원은 《월말통신》을 통해 대중에게 이렇게 주장했다. “본교의 사업과 계획은 그 규모가 방대하여 1년에 성취할 일도 아니요, 10년에 종결할 일도 아니니 우리는 적어도 희생적 노력을 각오하자. 세계가 요청하는 새 종교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하지 아니함이지 결코 불능함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서대원은 깨달음에 대한 강한 집념을 놓을 수 없어 계룡산 선방과 수덕사(修德寺) 등을 비롯하여 산으로 또는 절로 수양의 행로를 펼쳤다. 특히 불경(佛經)과 염불ㆍ참선에 주력했다. 산사의 구석진 방에서 하루에 3시간 수면으로 불경을 독파하기도 했다.
주위에서는 생활 속의 불법공부를 버리고 입산했다고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서대원의 소태산에게 바치는 신성은 변함이 없었으며, 신(信)의 표시로 손을 자르는 결단을 실행했다. 이에 소태산은 “몸은 곧 공부와 사업을 하는데 없지 못할 자본이거늘 그 중요한 자본을 상하여 신을 표한들 무슨 이익이 있으며 또는 진정한 신성은 원래 마음에 달린 것이요, 몸에 있는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누구든지 절대로 이러한 일을 하지 말라”(《대종경》 신성품17) 하며 크게 꾸중했다.
심한 출혈을 한 뒤 결핵까지 앓게 된 서대원은 이완철(應山李完喆)을 따라 서울에서 요양하던 중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의 열반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내려와 소태산의 영구 앞에 엎드리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토로했다. “스승님을 뵈옵던 그날부터 쓸쓸한 내 가슴 한 모퉁이에 희망의 꽃망울 맺히었더니 서러운 영이별이 웬일일까. 내 등불 밝게 켰다가 후일에 이 몸 바칠 때에 또다시 뒤를 따르리”(《성가》 53장 추모의 노래)라는 추모시를 남겼다. 서대원은 1945년(원기30) 5월 2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소태산의 뒤를 따라 열반했다.
충천했던 신성과 재질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한이 없는 일생이었다. 고향에서 보내온 돈으로 구입한 일어와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은 후일 원광대학교 도서관의 모체가 되었고 《불교정전》 편찬시에는 ‘무시선법’과 ‘참회문’을 초안했으며, ‘천상락과 인간락’(《월보》 제41호), ‘일원상의 유래와 법문’(《회보》 제54호~제56호), ‘미륵불시대와 용화회상’(《대종경》 전망품18)이라는 대종사 법문을 수필했다. 《우당수기(愚堂手記)》 등 문답을 통해 소태산의 법설을 많이 수필했다.
“물을 긷고 나무를 운반할지라도 불(佛)의 진리를 알고 하면 활불이요, 밭을 갈고 똥을 칠지라도 불(佛)의 지행을 알고 하면 활불이다”, “내 속에 불(火)을 묻어주는 악연(惡緣)일수록 더욱 사랑으로써 대하여 그 업연(業緣)을 묻으라”, “연잎에 비내리니 이슬만 궁글더라. 그다지 내린 비가 흔적이 어디런고. 이 맘도 저러하면 연화대인가 하노라” 등 짧은 글 속에서 서대원의 신앙과 수행의 깊은 경지를 읽을 수 있다. 또한 ‘미륵불세계’(《회보》 제32호)라는 논설을 썼다. 서대원은 특히 불경공부를 많이 하고 연구의 깊은 경지를 궁구한 만큼 과거 부처님의 말씀이나 천지의 현묘 난측한 이치에 대해 많은 의심건을 제출하여 소태산의 법문을 얻었다(《대종경》 변의품4~8).
서대원은 자신은 정남으로서 가정치산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으면서도 결혼하여 가족을 책임져야 할 동지들을 위한 전무출신 사가(私家)후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대종경》 교단품15). 서대원은 불경에 대한 연구가 깊어 《회보》에 각종 불경을 해석해 연재함으로써 《불조요경》을 간행하는데 밑받침이 되었다. 또한 천도법문의 위력을 질문하여 소태산의 그 위력에 대한 법설을 수필했다(《대종경》 천도품31). 1985년(원기70) 3월, 제108회 수위단회에서는 서대원의 높은 공덕을 추모하면서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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