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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성
[宋道性, 1907~1946]

주요약력 생애와 활동 사상

주요약력

본명은 도열(道悅). 호는 직양(直養). 법호는 주산(主山). 법훈은 종사. 정산종사의 동생이다. 영산지부장겸 교무, 총부교무, 총무부장, 교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송도성은 1907년 12월 23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서 부친 벽조(久山宋碧照)와 모친 이운외(準陀圓李雲外)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야성(冶城). 조선 명종 때의 명신인 송희규(宋希奎)의 14세손으로, 그의 선조들은 이웃 마을 고산동에서 4백여 년 동안 단일씨족으로 효행과 학문을 빛내며 살아왔다. 그의 일가가 소성동으로 이사한 것은 부모가 결혼한 후 얼마 지나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정직하고 정의감이 투철했으며, 4세 때부터 조부 송훈동으로부터 한학을 익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쳐 신동으로 불렸다.

종친인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 송준필(恭山宋浚弼)도 일찍이 문리를 얻은 송도성을 보고 장차 그 대성을 예언한 바 있었다. 친형인 정산은 1918년(원기3) 7월 방언공사가 한창일 때 영산성지로 가서 수위단 중앙단원이 되었다. 이어 부친인 송벽조는 영산성지를 찾아 소태산께 귀의했고, 1919년(원기4) 9월에 전 가족이 영광으로 이사하여 군서면 학정리 신촌에 정착했다가, 1924년(원기9)에 길룡리로 옮겼다. 송도성은 13세에 소태산을 처음 뵙고, 법문을 들은 자리에서 곧 제자되기를 청했다. 이를 기특히 여긴 소태산이 ‘네가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났느냐’고 묻자 송도성은 ‘마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넓고 큰 것이니 정신을 수련하여 지극히 큰마음을 확충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어 소태산이 ‘네가 도의 성품을 알았구나. 앞으로 도성(道性)이라 이름하거라’ 하며 법명을 지어주었다. 송도성이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살기는 14세 때 영광으로 이사한 후 반년쯤 지나서였다. ‘도성이 하고 길선이를 한번 바꿔서 가르쳐봅시다’ 하고 어른들 사이에 이야기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그 후 1928년(원기13) 22세시에 결혼했다. 송도성은 1922년(원기7) 16세 때 부안 변산에 주석하며 교법을 초안하던 소태산에게 “마음은 스승님께 바치고 몸은 이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獻心靈父 許身斯界 常隨法輪 永轉不休)”는 출가시를 바치고 전무출신했다.

석두암에서 여섯 동지와 더불어 소태산을 모시고 낮에는 산전(山田)을 개척하여 생활의 근거를 삼고 밤이 되면 법석에 참석하여 법을 듣고 즐겁게 살았다. 법설내용은 대개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방법을 설했는데 송도성은 이 법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1924년(원기9)에는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개최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후, 익산총부건설에 혈성을 다했다. 1925년(원기10) 4월 정수위단 보궐 및 대리조직 시 이순순(二山李旬旬)의 대리로 수위단 감방(坎方)단원이 되었다. 1926년(원기11)에는 서울출장소 초대교무로 파견되어 1년간 서울교화의 기틀을 다졌으며, 1927년(원기12)에는 다시 총부 서무부 서기로 봉직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연구부 서기로 전임되어 교단 최초의 월간지인 《월말통신》을 간행했다. 의로움에 찬 붓으로 날카로운 시대감각을 가지고 회중(會衆) 내의 상황보고와 현실에 적절한 소태산의 법설을 기재하여 회원들의 공부방향의 지침서로 삼게 했다. 회원들의 공부 발표와 각지 예회상황을 기록하여 교단사의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1929년(원기14)에는 정식 수위단원이 되었고, 1930년(원기15)에는 교무부장의 중책을 맡아 《월말통신》을 발전시켜 《월보》를 간행했다. 1932년(원기17)에는 영광(영산)지부 교무부장 겸 지부장으로 발령되어 한발과 폭염으로 인한 극심한 재해를 극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37년(원기22)에는 교정원장에 임명되었고 교무부장과 감찰부장까지 겸하여 교단 발전에 혼신의 정열을 다했다. 1939년(원기24)에는 총부 교감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경진년의 동선(冬禪)에 심혈을 기울여 법풍을 진작시켰다. 교법실현에 앞장서 상시일기와 정기일기며 매일 좌선시간에는 부동의 자세로 진경에 드는 모습을 학인들에게 전수시켰다. 동ㆍ하선의 전후에는 상설학원 체제로 이끌어 학원생에게 교단의 주인정신과 신심을 심어주기 위해 일일이 개인지도에 전념했다. 그때 학원생이었던 제자들 중에는 송도성의 따가운 회초리가 약이 되고 거름이 되어 교단의 중심 인재가 되었다.

1942년(원기27)에는 다시 영광(영산)지부 교감 겸 지부장을 역임했다.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의 열반을 당하여 비통한 가운데 수위단 중앙단원에 피선되어 정산을 보필했다. 1945년(원기30)에는 총무부장에 부임했다. 1945년(원기30)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전재민 구호사업회를 발기해 서울ㆍ익산ㆍ전주ㆍ부산 등지에서 일본ㆍ만주ㆍ중국 등 해외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구호사업(戰災同胞救護事業)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다했다. 고아원인 보화원을 설립하여 교단 자선사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교단의 지도자였던 송도성은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몰두하던 중 이재민의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채, 교단의 중대현안을 의논하기 위해 총부에 내려오다 건강이 악화된 후, 1946년(원기31) 3월 27일 40세를 일기로 소태산의 게송을 암송하면서 열반했다.

작은 키에 위용과 정열에 넘치는 모습,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송도성은 교단 창업기의 기둥으로서 괄목할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6년(원기31) 4월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된 금강청년단(金剛靑年團)은 뒷날 원불교청년회의 모체가 되었다. 특히 청년지도와 후진양성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자신 수행에도 철저했다. 서예와 달마상(達摩像) 그리기에 능했으며 진보주의자로서 패기에 넘친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각 종교의 경서(經書)에 통달하는 지혜와 신구학문을 이해하는 지식에 이르기까지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었고, 신문ㆍ잡지ㆍ문학서적을 보고 아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문필에도 능하여 ‘오, 사은이시여’ㆍ‘진경(眞境)’ㆍ‘적멸(寂滅)의 궁전(宮殿)’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詩歌)와 논설을 남겼다. 1954년(원기39) 4월 제2회 수위단회에서 송도성을 출가위로 추존하고, 1957년(원기42) 종사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1991년(원기76)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대회를 맞아 송도성의 법위를 ‘대각여래위’로 추존했다.

사상

송도성의 시가와 논설에 담긴 사상을 요약하면 사은론(四恩論)과 돈수론(頓修論)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사은론:송도성은 사은을 타력신앙의 대상과 자력신앙의 대상으로 보았다. 일반적으로 사은은 타력신앙의 대상으로 보지만 송도성은 사은을 타력과 자력의 신앙 대상으로 본 것이다. 그의 시가인 ‘사은송’에 사은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오, 사은이시여. 거룩하신 사은이시여. 나에게 힘을 주소서. 꿋꿋하고 근기 있는 힘을 주소서. 아무러한 홀림에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어떠한 고난이라도 이겨 갈만한 꿋꿋하고 근기 있는 그 힘을. 자아를 완성하고 사회를 개조함에는 오직 그 힘이 필요하오니. 아무리 미소한 저에게라도 사은께서 그 힘만 밀어주신다면 분연히 일어나서 두 팔을 부르걷고 일터로 달음질하겠나이다.

오, 사은이시여. 거룩하신 사은이시여. 나에게 빛을 주소서. 밝고 큰 빛을 주소서. 심오한 진리를 꿰뚫어 보고 천만사물에 막힘이 없는 맑고 큰 빛을. 자아를 완성하고 사회를 개선함에는 오직 그 힘이 필요하오니. 아무리 미소한 저에게도 사은께서 그 빛만 드리워주신다면 발연히 일어나 두 눈을 바로 뜨고 훈구로 뛰어 들겠나이다. 오, 사은이시여. 나에게 열을 주소서. 영원히 식지 아니할 뜨거운 열을 주소서. 북양의 빙산이라도 히말라야의 눈 더미라도 넉넉히 녹여낼 수 있는 그 열을. 자아를 완성하고 사회를 개선함에는 오직 그 열이 필요하오니. 아무리 미소한 저에게라도 사은께서 그 열만 넣어주신다면 맹연히 일어나 피땀을 두루치고 냉박한 사회를 개척하겠나이다.

그러나 나 밖에 사은이 있지 아니하고 사은 밖에 내가 없나니. 사은에서 얻어오는 힘 곧 나의 원천이라. 나는 나에게 모든 부족함이 있음을 발견할 때 언제든지 나의 원천 곧 사은의 본처에 향하여 구하려 하나이다. 오, 사은이시여, 거룩하신 사은이시여”(《회보》 제24호). 송도성은 사은을 각각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있다. 먼저 그는 타력신앙의 대상인 사은에 대하여 어떠한 고난이라도 이겨 갈만한 꿋꿋하고 근기 있는 힘을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북양의 빙산이라도 히말라야의 눈더미라도 넉넉히 녹여낼 수 있는 그 열을 달라’고 외치고 있다.

‘아무리 미소한 저에게라도 사은께서 그 힘만 밀어주신다면, 그 빛만 드리워 주신다면, 그 열만 넣어주신다면’이라 하여 미소한 자기에게 사은이 위력을 내려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어떠한 고난이라도 이겨 갈만한 힘은 오직 사은의 신앙에서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며 북양의 얼음산과 히말라야의 눈 더미를 녹여낼 수 있는 열도 사은의 신앙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미소한 저에게라도 분연히 일어나서 두 팔을 부르걷고 일터로 달음질하겠다는 것은 미소한 사람에게는 절대적으로 사은의 신앙이 필요한 것이며, 그 신앙의 힘은 모든 일을 성공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사은께서 그 열만 넣어주신다면 결연히 일어나 혈성으로 사회를 개척하겠다는 것이다.

사은의 신앙만이 사회를 개척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사회를 개조함에는 오직 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은에 대한 신앙과 보은생활만이 사회와 세계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를 개선함에는 오직 그 열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은의 신앙이 세계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력신앙의 대상인 사은에 대하여, 그는 마음에 수양ㆍ연구ㆍ취사의 삼대력이 갖추어 있음을 믿는다. 그리하여 삼대력을 꿋꿋하고 근기 있는 힘, 밝고 큰 빛, 뜨거운 열로 밝히고 있다. 자아를 완성함에는 근기 있는 힘, 밝고 큰 빛, 뜨거운 열이 절실히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를 완성한다는 것은 삼대력을 얻는 것이다. ‘꿋꿋하고 근기 있는 힘’은 취사력으로 이해되기도 하나 ‘어떠한 유혹에도 넘어가지 아니하고 어떠한 고난이라도 이겨갈 만한 꿋꿋하고 근기 있는 힘’은 수양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오한 진리를 꿰뚫어 본다’는 것은 대소유무의 이치를 깨치는 것이며, ‘천만사물에 막힘이 없다’는 것은 시비이해의 일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북양의 얼음산과 히말라야의 눈 더미를 녹여낼 수 있는 열’이라는 것은 옳은 일은 죽기로써 실행하고 불의를 죽기로써 아니하는 취사력을 말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타력신앙의 대상은 법신불 사은이며, 불성 곧 삼대력은 자력신앙의 근원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송도성은 삼대력을 얻는 근원도 사은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자아완성의 하나인 고난을 이겨갈 만한 꿋꿋하고 근기 있는 힘(수양력)을 ‘거룩하신 사은이시여 꿋꿋하고 근기 있는 힘을 주소서’라 하여 사은에게 구하고 있다. 수양력도 신앙의 대상인 사은의 위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아완성의 하나인 심오한 진리를 꿰뚫어 보고 천만사물에 막힘이 없는 큰 빛(연구력)을 ‘거룩하신 사은이시여 밝고 큰 빛을 주소서’라 하여 사은에게 찾고 있다. 연구력도 사은에 근원해야 된다는 것이다. 자아완성의 하나인 북양의 빙산과 히말라야의 눈 더미를 녹여낼 수 있는 열(취사력)을 ‘거룩하신 사은이시여. 뜨거운 열을 주소서’라 하여 사은에서 얻어진다고 믿고 있다. 취사력도 사은을 바탕으로 얻어진다는 것이다.

② 돈수론(頓修論):송도성은 수행정진해서 삼대력을 얻었다고 본다. 돈오 즉시 돈수가 되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진경’을 비롯한 그의 저술을 보면 점차적으로 닦아가는 내용보다는 성품이 확연히 드러나는 돈수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돈수론이라 하는 것이다. 이 돈수론은 ‘일원상의 수행’에 근거한다.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을 알고, 양성해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깨친 그대로 지켜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돈수적인 것이다. 원만구족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경지이며 지공무사는 절대적으로 공정한 경지이다.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공정한 본래의 성품을 확연히 깨치고 그 깨친 성품을 발양시키고 그 성품을 모든 일에 적실하게 활용하여 수양력ㆍ연구력ㆍ취사력을 얻는 것이 일원상의 수행이다. 그는 성품의 ‘진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찼다면 다북차고 비었다면 텅 비어서 두렷한 거울 속에 파도 없는 잔물결이 고요히 움직이나니 진경인가 하노라. 닦자니 본래 맑고 기르자니 근본커서 조촐한 둥근 옥을 아로새김 병통이라 아마도 수양심 놓음이 참 수양인가 하노라. 소리로 못 전하고 동작으로 형용 못할 영보국 가는 길을 누구에게 물었관데 남 몰래 찾아온 이들 홀로 즐겨 하노라”(《회보》 제24호).

소태산은 《정전》 ‘일원상법어’에서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마음 그대로를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 육근에 즉시 사용하는 돈수의 길을 밝혔다. 그러나 소태산은 상ㆍ중ㆍ하의 모든 근기가 다 같이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원종지와 사은사요 삼학팔조는 온 천하 사람이 다 알아야 하고 다 실행할 수 있으므로 천하의 큰 도가 되나니라”(《대종경》 교의품2). 온 천하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수행의 길을 밝혔으며 온 천하 사람이 다 실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소태산의 뜻을 받들어 정산은 “그 망념을 닦고 그 진성을 기른다”(《정산종사법어》 경의편19)고 했다.

이것은 상ㆍ중ㆍ하의 모든 근기가 실행할 수 있고 천하 사람이 다 실행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다. 송도성은 ‘닦자니 본래 맑고 기르자니 근본 크다’고 했다. 본래 맑은 마음 그대로를 지키는 돈수의 길이다. 이는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한 경지를 그대로 발현하는 면을 중심한 것이며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조촐한 둥근 옥을 아로새김 병통이라’하여, 본래 맑은 마음을 다시 닦는다는 것은 조촐한 둥근 옥을 아로 새기는 것이 되며 원래 더 할 수 없이 큰 것을 다시 기른다는 것도 둥근 옥을 아로 새기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그런 뜻에서 ‘아마도 수양심 놓음이 참 수양인가 하노라’고 했다.

수(修)하고 양(養)한다는 것, 곧 닦고 기른다는 것은 착실하게 닦아가는 면도 인증하지만 원래 닦을 것도 없고 기를 것도 없는 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송도성은 돈수의 면을 강조했다. 소태산은 “사람 가운데 문즉문오(聞卽聞悟)하여 돈오돈수하는 최상근기도 있고 돈오점수 하는 상근기도 있으며”(《금강산의 주인》)라고 했다. 이렇게 보면 송도성은 소태산이 밝힌 돈오돈수라는 최상근기의 수행을 강조한 것이다. 자녀 천은ㆍ수은ㆍ관은 삼남매가 전무출신했다. 〈韓正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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