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약력 생애와 활동
주요약력
본명은 재풍(載馮). 법호는 일산(一山). 법훈은 대봉도. 구인선진의 한 사람. 불법연구회 상조부장, 서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이재철은 1891년 2월 11일 전남 영광군 군서면 학정리에서 부친 관현(寬現)과 모친 김화옥(金華玉)의 4남매 중 독자로 출생했다. 일찍이 한문사숙에서 6~7년간을 수학하고 그 후 노모를 모시고 가사(家事)에 종사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문명에 관심이 많았고 가정생활을 하는데에도 이상을 가지고 진보적 생활을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이상에 맞지 않았으며 마음 가운데에는 항상 이 세상을 바로잡을 정법(正法)의 지도자와 의인(義人)이 없음을 개탄했다. 그러던 중 1916년(원기1) 4월 오창건의 인도로 소태산대종사를 뵙고 즉석에서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었다.
소태산이 대각 후 비몽사몽간에 생각한 경전이 《금강경》이었는데, 소태산의 명을 받들고 불갑사(佛甲寺)에 가서 구해드린 것이 이재철이었다. 그 후로 이재철은 소태산의 대도(大道)를 봉대하는 마음이 날로 간절해지는 가운데 1917년(원기2) 7월 26일 교단의 최초 남자 수위단이 조직될 때 건방(乾方)단원으로 임명되었다. 이재철은 저축조합 경제관계 사무와 외무를 거의 도맡아 처리했다. 1918년(원기3) 28세시에는 간석지 방언공사와 구간도실 건축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대업을 성취했다.
이재철은 주로 외무와 금전출납사무를 맡았고 동지들과 흙짐을 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발바닥이 부르트고 어깨와 등이 부어올라 사뭇 못 견딜 지경이었는데, ‘차라리 귀한 집 독자가 아니었더라면 진작 흙짐 지는 연습이라도 해두었을 것을’이라는 후회도 생겼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라 불을 쬐다가 솜옷에 불이 붙어도 모르고 불을 쬔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일편단심 무아봉공이었다. 이재철은 1919년(원기4) 3월 26일부터 소태산의 지도를 받아 8인 동지와 함께 창생구원을 위해 혈심으로 기도했으며, 마침내 생명희생의 대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의 감응을 얻어 백지혈인의 법인성사(法認聖事)를 이루었다.
혈인기도시 효성이 남달리 장했던 이재철은 창생을 위해 자신 한 몸 죽는 것은 여한이 없으나 홀로 계신 모친이 걱정이 되었다. 소태산이 이재철의 심중을 헤아리고는 ‘모친의 시봉은 내가 책임을 질 테니 안심하라’고 말했고,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명 희생의 결심을 굳게 했다. 기도 마지막 날에는 모친에게 한약을 지어 인편에 전하기도 했다. 이재철은 키가 크고 신상(身相)이 구족하며 위풍(威風)이 좋아 ‘영광(靈光)의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었다. 또한 천성이 온순ㆍ정직ㆍ현량(賢良)하여 누구를 대하나 항상 화기로웠고 인자했다.
그러나 중심은 철두철미하여 대의가 분명하고 강직했다. 좌담과 외교에 능했을 뿐 아니라 양보의 도가 강했던 관계로 누구든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영광에서는 이러한 이재철에 대해 ‘장님이 만져봐도 양반’이라며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성격을 지닌 이재철은 평소에는 말이 퍽 적은 편이었으나, 옳은 일에는 몸을 돌보지 않았다. 또한 아래 사람들의 세정을 일일이 살펴주었고 항상 용기와 희망을 넣어준 자비로운 선진이었다. 무슨 일이든지 아래 사람이 잘못하는 일이 있어도 여러 사람 앞에서 꾸중하는 일 없이 항상 조용히 타이르고 자상히 가르쳐 주었다.
이재철은 마음이 상통한 팔촌 동생 이동안을 소태산께 귀의시켰다. 이것이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 함평(咸平) 이씨 일가문이 원불교에 귀의하는 계기가 되어 수십 명이 전무출신하여 교단의 창립과 발전에 공헌하는 계기가 되었다. 9인 선진의 한 사람으로서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 등을 마친 이재철은 그 후 영산에서 계속 교단 창립에 일하다가 1924년(원기9)부터 총부 건설에 합력했다. 1927년(원기12)에는 육영부 창립 단원으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동년 총부 서무부장으로 1년간 봉직하기도 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영산 상조부장으로 전임되어 2년을 근무했고, 1928년(원기15)에는 영산지부장을 겸하여 2년간 일했다. 1933년(원기18)에는 총부 상조부 지점장 겸 공익 인재부장으로 일했고, 1934년(원기19)부터 5년간은 총부 서정원장으로 봉직했다. 1941년(원기26)에는 총부 이사겸 산업부장으로, 1942년(원기27)부터 열반 전까지 총부 산업부장으로 근무했다. 이재철은 언제나 소태산 앞에서는 손을 내려놓은 일이 없고 겸허한 태도로 공수(拱手)를 하며 물러날 때에도 그냥 되돌아서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재철은 좌담이 능하고 외교를 잘하여 방언공사 당시 ‘금융조합’에서 자금을 대출 받는 등 교단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상에 올라 설교는 거의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재풍(일산)은 본시 풍골이 늠름하고 세상 상식이 풍부하여 매양 대종사를 친견할 때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르신 점을 대종사의 체상(體相)에서 살피려 했다.…대종사 웃으시며 말씀하시었다. ‘성현을 마음의 법으로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몸의 표적으로 찾으려 하는 것은 곧 하열한 근기인 것이다’ 재풍이 크게 깨달아 다시는 이적을 살피지 아니하고 평생토록 정법을 받들었다”(《대종경선외록》 초도이적장6).
이재철은 1943년(원기28) 11월 15일 영광군 백수읍 천마리 자택에서 숙환으로 53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특히 이재철은 스승인 소태산과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열반한 묘한 인연이기도 하다. 슬하의 손녀인 정무가 전무출신했다. 이재철은 출가 후 23년간을 영광 또는 총부에서 교단사업계의 중책을 맡아 초기 교단의 경제적 기초를 다지는 데 크게 공헌했다. 원기20년대에는 총부 서정(庶政) 전반에 걸쳐 그 역량을 드러내어 공헌했다. 이재철은 공사에 전력할 때 자신의 명예와 이욕은 일체 불고하고 오로지 교단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이재철이 열반하자 교회전체장으로 엄수했고 유해는 전남 영광군 백수읍 천마리에 안장했다가 1985년(원기70) 3월 ‘영모묘원’ 법훈묘역으로 이장했다. 1964년(원기49) 10월 제9회 수위단회에서는 이재철의 높은 공덕을 추모하면서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韓正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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