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대사전„

원불교 용어사전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개요 의미의 변천사 원불교와 일체유심조

개요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인간의 마음이 들어서 짓는다는 것. 곧 길흉화복(吉凶禍福)ㆍ흥망성쇠(興亡盛衰)ㆍ희로애락(喜怒哀樂) 등이 다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요 인간의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미이다. 각자의 마음이 들어서 온갖 조화를 다 부려 시비(是非) 선악을 가져오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소승ㆍ대승 등 불교의 다양한 교파에 따라 그 의미가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의미의 변천사

일체유심조란 표현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화엄경》으로서 “만일 사람들이 삼세일체불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이 모두가 마음의 짓는 바에 달려있음을 보라(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는 표현에서 비롯된다. 여기서의 법계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뿐 아니라, 주관적으로 체험되는 정신적 경지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모든 법계가 마음의 산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일체유심조란 표현은 《화엄경》에서 대두되었지만 그 단초는 초기불교부터 보였다.

초기불교에서는 유물론이나 유심적 관점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해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연기의 이법에 의한 중도적 관점을 제시했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세계관을 유심론적으로 해석하기는 적절하지 않다. 다만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을 실천적 수행을 통하여 무명을 벗어나 지혜를 얻는 마음수련을 통해 달성하려는 면에서 마음을 중시한 특징을 지닌다. 팔정도를 중심한 실천적 마음 수련 중심의 가르침에서 대승불교로 접어들면서 점차 그 경향이 변화되었다. 모든 존재의 생성변화의 근원이 마음에 있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특히 유식사상에서는 ‘삼계가 모두 마음의 소산이며 만법이 오직 식의 나타남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라는 사상이 제기된 바 있다. 여기서의 심은 중생의 내면적 의식 활동뿐 아니라 외부에 펼쳐진 객관세계 전체의 뿌리라는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를 오직 주관적 심식작용만 있을 뿐 개관적 대상은 없다(唯識無境)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유식사상에서의 궁극적 식은 인간의 내면적 의식에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며 우주자연의 근원이라는 의미까지 확대된 것이다. 자연현상도 심식에 의한 업의 소산으로 보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유심적 경향이 화엄사상에 이르러 일체유심조라는 개념으로 표현된 것이다. 화엄사상의 경우 모든 존재의 근원을 진여본성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인연에 의한 연기설을 성기설로 발전시켰다. 모든 것을 함장한 진여본성(眞如本性)이라는 근원적 존재는 나타난 모든 존재에 그대로 상즉해 있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천태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 경우의 마음은 이미 주관적 심식자용의 범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주객을 통합한 보다 근원적 의미를 지닌다.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도 화엄사상을 이론적으로 깊이 연찬하여 이를 화쟁사상(和諍思想)의 이론적 기초로 삼고 무애행(無챗行)이라는 실천적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의하면 원효는 의상대사와 더불어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던 도중에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시고는 일체유심조를 깨닫고 당나라로 가던 발걸음을 신라로 다시 돌려 불교의 진리를 크게 깨우쳤다고 한다. 원효는 이 깨달음의 내용을 “마음이 일어나면 만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만법이 소멸한다”(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種種法滅)라고 표현했다.

인간이 선악미추를 비롯한 가치판단이나 사유작용을 하는 근본은 오직 한마음에 달려 있다는 의미이다. 원효는 이에 바탕하여 세간과 출세간에 대한 차별과 집착을 벗어나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무애행을 구현했던 것이다. 화엄의 일체유심조의 사상은 선불교에서 실천적으로 계승되었다. 육조혜능(六祖慧能)은 만법이 모두 본성의 나타남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고 본성의 자각을 통해 직접 자유와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혜능에 의하면 마음이 악하면 그 행동도 악하고 마음이 선하면 그 행동도 선하다. 마음이 깨끗하면 온 세상이 청정하고 마음에 때가 끼면 온 세상이 더럽다. 이 세상 모든 일이 한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이 이치를 철저히 알면 견성인 것이다. 혜능이 인종법사(印宗法師) 회상에 갔을 때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한 승려는 깃발이 동(動)한다 하고 또 한 승려는 바람이 동한다고 다투는 것을 보고 혜능은 동하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며 당신들의 마음이 동하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일화에서도 일체유심조의 의미를 찾아볼 수도 있다(《육조단경》).

나아가 그는 불교의 기본 사상이 자심(自心)을 떠나 있지 않음을 지적하고 불교의 모든 사상(思想)을 유심적(唯心的)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에 삼귀의, 사홍서원, 삼신불, 지옥과 정토 등의 여러 개념도 마음수행의 측면으로 끌어들여 해석했다.

원불교와 일체유심조

소태산대종사는 “원래 불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되는 이치를 스스로 깨쳐 알게 하는 교이니”(《대종경》 교의품27)라고 했다. 마음을 찾고 그 마음을 깨쳐서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짓도록 수행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의 의미는 불교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인과보응(因果報應)의 가르침을 편 사상이라는데 역점이 있다.

한편 그는 “불교는 천하의 큰 도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어서 능히 모든 교법에 뛰어난바 있나니라”(《대종경》 서품3)고 말한다. 이를 보면 불교에서 일체유심조의 이치를 가르친다는 의미는 본성을 깨닫고 수행의 길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이때의 본성은 우주만유의 본원과 상통되는 주객합일(主客合一)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유물론과 대립되는 의미의 유심론적 경향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李聖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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