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초기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앞 바다를 막아 만든 농토의 이름. 소태산대종사는 창립제자와 더불어 1918년(원기3) 5월부터 시작하여 다음해 4월까지 약 1년 동안 길룡리 앞의 갯벌을 막아 간척사업의 대역사를 전개했다. 간척의 방언공사가 완공됨으로 인하여 얻은 옥토의 전답을 정관평이라 한다. 정관평은 소태산과 창립제자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오늘날 원불교 창립정신의 산실이 되고 있다. 또한 정관평은 초기교단의 경제적 기반을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소태산과 구인제자의 자작자급, 주경야독, 영육쌍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정관평의 명칭은 1934년(원기19) 10월에 발행된 《회보》 제12호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회보》 제12호의 ‘각지현황’에서 영광지역의 근황이 소개된 바 있는데, “안전에 정관평의 도색(搯色)은 발수가 되어 구룡에 충만하고 서창에 학원단의 독서성은 신량(新凉)의 기후를 따라 더욱 근실하나니 주경야독으로 어학어농에 그 진진한 도미는 우리가 홀로 얻은 듯하며 더욱이 농형(農形)이 대등(大登)하여 전평을 도망할 시는 우리의 회산이 작구 윤강하는 듯하며 수도할 때가 더욱 든든하여지는 느낌이 있다”고 했다. 정관평은 1956년(원기41) 재방언공사를 통하여 도합 5만 3천평이 확보되었으며, 오늘날 영산성지의 영산출장소에서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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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