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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광
[曺頌廣, 1876~1957]

주요약력 생애와 활동

주요약력

본명은 공진(工珍). 법호는 경산(慶山).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 공타원 조전권의 부친. 기독교 장로(長老)의 신분으로 소태산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생애와 활동

조송광은 1876년 5월 10일 전북 정읍군 정주읍 연지리에서 부친 기승(淇承)과 모친 방수정화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릴 적부터 유학을 공부했고 18세에 동학 농민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의술을 익혀 약방을 경영하며 이름을 사방에 떨쳤다. 기독교를 신앙한 것은 27세 때부터였다. 신앙생활 5년만에 김제 원평에 구봉교회를 설립했고 43세에는 장로가 되었다. 또한 기미년 만세운동에도 참여했고, 은밀히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도 했다.

이웃에 사는 송적벽(호적명 찬오)으로부터 소태산을 한번 만나 보라는 제의를 여러 차례 받고 전주 한벽루(寒碧樓)에서 첫 만남을 갖게 되니, 1924년(원기9) 봄이었다. 조송광과 소태산이 서로 도덕 문답을 가졌다. 조송광이 말문이 막히는 사람이 제자가 되기로 제의했다. 2시간이 채 못 되어 조송광이 지고 말았다. 무슨 말을 해도 부족하자 제자 되기를 원하며 주고받은 대화가 다음 《대종경》 전망품 14장의 내용이다.

“조송광이 처음 와 뵈오니,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보통 사람보다 다른 점이 있어 보이니 어떠한 믿음이 있는가.’ 송광이 사뢰기를 ‘여러 십 년 동안 하나님을 신앙하온 예수교 장로이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다 하니 하나님은 어디 계시던가.’ 송광이 사뢰기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 부재하사 계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 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대가 늘 하나님을 뵈옵고 말씀도 듣고 가르침도 받았는가.’ 송광이 사뢰기를 ‘아직까지는 뵈온 일도 없사옵고 말하여 본 적도 없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대가 아직 예수의 심통(心通) 제자는 못 되지 아니했는가.’ 송광이 여쭙기를 ‘어떻게 하오면 하나님을 뵈올 수도 있고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공부를 잘하여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그리 할 수 있나니라.’

송광이 다시 여쭙기를 ‘성경에 예수께서 말세에 다시 오시되 도둑같이 왔다 가리라 했고 그때에는 여러 가지 증거도 나타날 것이라 했사오니 참으로 오시는 날이 있사오리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성현은 거짓이 없나니 그대가 공부를 잘하여 심령(心靈)이 열리고 보면 예수의 다녀가는 것도 또한 알리라.’ 송광이 사뢰기를 ‘제가 오랫동안 저를 직접 지도하여 주실 큰 스승님을 기다렸삽더니, 오늘 대종사를 뵈오니 마음이 흡연(洽然)하여 곧 제자가 되고 싶나이다. 그러하오나, 한편으로는 변절 같사와 양심에 자극이 되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예수교에서도 예수의 심통 제자만 되면 나의 하는 일을 알게 될 것이요, 내게서도 나의 심통 제자만 되면 예수의 한 일을 알게 되리라.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은 저 교 이 교의 간격을 두어 마음에 변절한 것 같이 생각하고 교회 사이에 서로 적대시하는 일도 있지마는, 참으로 아는 사람은 때와 곳을 따라서 이름만 다를 뿐이요 다 한집안으로 알게 되나니, 그대의 가고 오는 것은 오직 그대 자신이 알아서 하라.’ 송광이 일어나 절하고 제자되기를 다시 발원하거늘, 대종사 허락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나의 제자된 후라도 하나님을 신봉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져야 나의 참된 제자니라.’”

조송광은 소태산에게 심복은 했으나 정식으로 불법연구회 회원은 바로 되지 않았다.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변산과 익산으로 종종 소태산을 찾았다. 그러다 1925년(원기10) 약방에 불이나 약재와 물품, 서적이 전부 타 버리고 말았다. 조송광이 남긴 연대기(年代記) 《조옥정백년사(曺沃政百年史)》에 보면 “하늘이 큰 복을 내리려함에 반드시 작은 재앙으로 시험한다했으니 내게 혹시 영광 받들 기회가 멀지 아니하리라. 불법연구회에 정식으로 신입서 제출하고 박 선생(소태산)께 배례 후에 여년(餘年)을 부탁하다”고 밝혀져 있다.

소태산은 그에게 ‘송광(頌廣)’이란 법명을 내렸다. 이는 평소 그가 소태산의 법문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광대하옵니다. 선생님의 도덕이여’하고 칭송하여 마지않는 데서 나온 법명이다. 입교 후 조송광은 원평교당 창설에 앞장섰으며, 1928년(원기13) 제1대 제1회 기념총회에서 불법연구회 제2대 회장에 피선되어 교단 초창의 대소사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한때에 소태산이 서울에 행가할 때 조송광, 전음광 등 여러 제자가 이리역까지 전송을 나갔다. 이리역에 가기 위해 남중리 마을을 지날 무렵 마을 뒤에 있는 노송(老松)을 보고 스승과 제자들간에 오간 구전심수의 법문이 1929년(원기14) 11월에 간행된 《월말통신》 제21호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을 축약한 것이 다음과 같은 《대종경》 불지품 20장의 내용이다.

“대종사 하루는 조송광과 전음광을 데리시고 교외 남중리에 산책하시는데 길가의 큰 소나무 몇 주가 심히 아름다운지라 송광이 말하기를 ‘참으로 아름다워라. 이 솔이여! 우리 교당으로 옮기었으면 좋겠도다.’ 하거늘 대종사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어찌 좁은 생각과 작은 자리를 뛰어나지 못했는가. 교당이 이 노송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 노송이 교당을 떠나지 아니하여 노송과 교당이 모두 우리 울 안에 있거늘 기어이 옮겨놓고 보아야만 할 것이 무엇이리요. 그것은 그대가 아직 차별과 간격을 초월하여 큰 우주의 본가(本家)를 발견하지 못한 연고니라.’ 송광이 여쭙기를 ‘큰 우주의 본가는 어떠한 곳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지금 보아도 알지 못하므로 내 이제 그 형상을 가정하여 보이리라’ 하시고, 땅에 일원상을 그려 보이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곧 큰 우주의 본가이니 이 가운데에는 무궁한 묘리와 무궁한 보물과 무궁한 조화가 빠짐없이 갖추어 있나니라.’”

1931년(원기16) 3월, 총회에서 불법연구회 회장에 재선된 조송광은 그해 8월, 소태산과 더불어 부산ㆍ경주 등 경상도 일대를 순회했다. 처음으로 경상도 여행을 나선 소태산은 부산에서 많은 인연들을 만났고, 동래 범어사, 양산 통도사, 경주 불국사 등을 거쳐 경북 월성군 현곡면 구미 용담 최제우의 유적을 찾았다.

소태산은 석굴암 방명록에다 ‘저 무정한 석불도 모든 사람의 찬의를 받거든 하물며 구별력 있는 사람이 어찌 그저 있으랴’고 적고 스스로 불려거사(不侶居士)라 칭했다. 석굴암 앞에서 조송광이 소태산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1936년(원기21)까지 9년간 불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한 조송광은 그 이후 16년간 원평교당 교도회장으로서 지역 교화 발전에 적극 노력했다. 1957년 10월 5일 82세로 열반했다. 만식ㆍ전권ㆍ일관 등 세 자매가 전무출신했다. 〈宋仁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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