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초기에 월간으로 발행하던 정기간행물로서 《월말통신》(1928년 5월 31일 창간)을 필두로 제36호(1932년 음력 5월)부터 제호를 바꾸어 발행한 《월보》를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월말통신》은 주간을 담당하던 송도성의 건강악화 등을 이유로 약 15개월 동안 정간되었다가 1932년(원기17) 음력 4월에 복간했고 다음 달부터는 제호를 《월보》로 변경했다. 하지만 제47호(1933년 5월)까지 발행되던 《월보》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출판허가가 없다는 이유로 적발되어 제48호 전부를 일경(日警)에게 압수당하고 폐간되는 수모를 겼었다.
따라서 다시 정식으로 절차를 밟기 시작하여 1933년(원기18) 9월, 총독부 당국의 정식 허가를 얻어 월간 《회보》(주간:전음광)를 창간하게 되었다. 분량은 30~50쪽에 달하며, 창간호부터 12호까지는 등사판, 제13호부터 제65호까지는 인쇄본으로 발행했다. 《회보》는 창간호부터 소태산대종사의 법설ㆍ교리해설ㆍ교도들의 감각감상ㆍ교단소식 등을 실어 교도들의 교리 훈련과 수행에 기여했다. 매호의 권두의 회설(會說)에 “원불교인의 신앙, 수행, 생활, 사명은 물론이요 정신개벽, 도학과 과학문명의 조화 등 세계사의 방향, 원불교의 제도와 사업, 불교 진리의 우수함과 혁신, 소태산대종사와 창립정신 등”을 수록함으로써 인류의 정신개벽을 주창하고 제생의세의 사명을 강조했다.
원불교인의 신앙과 수행, 그리고 생활을 제시하면서 불법의 우수성과 불교의 혁신을 역설하는 논지를 전개하면서 교화와 문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교단의 기관지로서 일제강점기의 원불교에 있어서 유일한 문화 활동의 명맥이 되었고 초기교단의 정신적 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회보》 제13호(1934년 12월)부터 주간을 이공주(통신부장)로 바꾸고 인쇄판으로 변경하면서 점차 발행부수도 증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편집방향도 “난문난자(難文難字)보다 대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간이 평범한 문구를 환영한다. 소태산대종사의 법설과 회원의 감각감상ㆍ의견처리ㆍ문목 등을 정선해 발표했고 회원의 논문ㆍ시ㆍ소설이나 교리해설ㆍ각종 예문 및 규약 등으로 회보의 사명을 다하고자 하노니 우리는 이 《회보》를 일개 잡지로 볼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개의 보경(寶經)으로서 신중히 취급하여 숙독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공개함으로써 대중의 적극적인 투고를 장려함은 물론이요 《회보》가 보배로운 경전으로서 위상을 갖게 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 《회보》는 1940년(원기25) 제2차 세계대전이 급박해지면서 계간으로 바꾸었다가 1941년(원기26) 1월, 통권 제65호를 마지막으로 일본의 언론탄압정책과 경제의 핍박으로 인하여 자진 정간했다.
1945년(원기30) 8월 15일 광복 이후 《회보》를 계승한 것이 월간 《원광》이다. 《회보》는 그 이전에 발행된 《월말통신》과 《월보》와 더불어 원불교 교리성립사와 초기교단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월말통신》ㆍ《월보》ㆍ《회보》는 원불교의 초기모습과 일제의 언론탄압 등 일제치하 수난의 면모들을 살피는 데 있어서 매우 귀중한 원불교 역사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원불교 교리, 제도, 사상 등의 형성과정과 초기교단의 발전사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소중한 사료임과 동시에 한국잡지사에 있어서도 종교단체가 자립적 힘으로 발전시킨 민중잡지의 한 표본으로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高元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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