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불교의 참회 그리스도교의 참회 원불교에서 참회
개요
자신이 범한 죄나 과오를 깨닫고 뉘우치는 일. ‘참(懺)’은 싼스끄리뜨의 끄샤마(kṣama))의 음역으로 ‘인(忍)’을 의미한다. 타인에게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엄밀히 따지면 실수를 뉘우치는 ‘회(悔)’와는 의미가 약간 다르지만, 점차로 ‘참’과 ‘회’가 동일시되어서 ‘참회’라는 말이 쓰여 지게 되었다. 참(懺)에 회(悔)자를 보탠 것은 싼스끄리뜨와 한어(梵漢) 두 말을 합쳐서 사용한 것이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회과(悔過)의 뜻으로 사용된다. 불교・개신교・가톨릭교 등에서 종교적인 용어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는 타인에게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뜻으로 쓰인다. 개신교에서는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죄악으로 가득찬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교에서는 ‘고해’라고 하여 세례를 받은 자가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 의식절차를 뜻한다. 각 종교의 참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의 참회
과거에 지은 죄업을 진정으로 뉘우쳐 부처님 앞에 그 잘못을 고백하고 또다시 죄악을 범하지 않겠다고 엄숙히 맹세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懺)은 싼스끄리뜨 끄샤마(kṣama)의 음역. 불교에서는 이미 석가 당시부터 잘못을 뉘우치는 법이 중요시되어, 포살(布薩) 및 자자(自恣)라고 불리는 참회법이 행해졌다. 포살은 보름에 한번 계본(戒本)을 외워 죄과의 수를 세고, 자기가 범한 죄가 있으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참회하고, 연장의 승려로부터 용서를 받는다. 자자는 안거(安居) 동안의 마지막 날에 승려들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며, 각자 참회・고백하는 방법이다.
고백한다는 의미의 데샤나(deśanā)라는 용어가 참회와 같은 의미로 사영된 것도 참회가 자발적인 것이면서도 모든 대중에게 죄업을 알린다는 뜻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참회의 종별로는, 예컨대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이 있다. 사참은 통상적인 참회와 똑같은 의미와 내용으로서, 과거와 현재의 죄업(罪業)을 참회하는 일, 이참은 일체의 망상을 씻어버리고 자신의 마음속 본성의 공적(空寂)을 깨닫는 일로서, 모든 죄업도 역시 실상(實相)이 아닌 것임을 깨닫고 죄를 소멸하는 참회이다. 참(懺)은 이미 지은 죄업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 회(悔)는 앞으로 죄업을 또다시 짓지 않겠다고 부처님 앞에서 맹세하고 약속하는 것이다.
참회의 방법에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사참은 부처님 앞에서 진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날로 선업을 쌓아 가는 것이다. 사참을 잘하기 위해서는 큰 서원을 세워 작은 욕심을 끊고, 현실생활 속에서 바른 지혜로 선악을 잘 판단하며, 거짓 없는 마음으로 법신불 전에 참회개과의 기도를 올리고,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악업을 끊고 선업을 지어 가는 것이다. 이참은 원래 죄성이 텅 빈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삼독오욕・사심잡념을 제거해 가는 것이다. 자성청정심에서 경계 따라 모든 죄업이 일어나므로 마음을 청정히 하여 본래 면목을 찾고 보면 죄라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참을 잘하기 위해서는 일체 만사를 다 마음이 들어서 짓게 되는 것임을 확실히 깨친다. 자성 원래에는 죄업도 텅 빈 것임을 확실히 깨쳐 동정간에 일상삼매 일행삼매의 힘을 얻어 가는 것이다. 진정한 참회를 위해서는 죄업의 근본이 되는 탐・진・치 삼독을 항복받아야 한다. 인간이 죄업을 짓게 되는 근본은 탐・진・치 삼독심이기 때문에, 아무리 참회를 한다고 하나 마음속의 탐・진・치를 그대로 두면 후일에 또다시 악업을 짓게 된다. 아무리 선업을 쌓아도 마음속에 탐・진・치가 남아 있으면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받게 되는 것이다. 지은 복보다 받을 죄업이 더 크다면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참회
개신교에서도 참회는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죄악에 빠진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일련의 행위를 회개(悔改)라고 하는데, 참회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현 존재를 사로잡고 있는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어떤 다른 힘을 빌려서 가능해진다.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것은 이교(異敎)의 신들, 재물이나 이기적인 욕심 등, 어떤 다른 구속력 있는 형식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에로 접근해 가는 일은 이때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식에서 방향을 바꾸고, 이때까지의 구속력에서 단호하게 벗어나 새로운 터전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승리함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여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한다. 하나님 자신이 용서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생각과 그런 생활에서 하나님에게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므로 믿음・참회・거듭남 등과 일치한다. 이것은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 종교개혁자 M.루터는, 인간의 죄는 고백이나 보상과 같은 인간의 행위로써 구제되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여 형식화된 고백을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적・내면적인 의미로서의 참회를 권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죄의 고백이 성사는 아니지만 마음의 평온을 구하는 신도에 대하여는 목사나 교회 앞에 하는 고백을 신앙에 대한 일조로서 인정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참회를 감정의 과장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공식적인 용어로는 쓰지 않고 대신 ‘고해(告解)’ 또는 ‘고백(告白)’이라고 하여 성사(聖事)의 하나로 본다. 고백은 세례를 받은 자가 청죄(聽罪)의 자격을 가진 사제(司祭)에게 죄를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 의식절차이다.
원불교에서 참회
소태산대종사는 참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범 참회라 하는 것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며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문이라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여 날로 선도(善道)를 행한 즉 구업(舊業)은 점점 사라지고 신업(新業)은 다시 짓지 아니하여 선도는 날로 가까워지고 악도는 스스로 멀어 지나니라”(《정전》 참회문)고 했다. 또 소태산은 죄업의 근원을 탐・진・치(貪瞋癡)라 보고 사람이 일시적 참회로서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죄업의 근원인 탐・진・치를 심중에 그대로 두면 마치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약간의 냉수만 갖다 붓고 밑에서 타는 불은 그대로 두는 것과 같아서 죄고를 면할 날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또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참이라 함은 성심으로 삼보(三寶)전에 죄과를 뉘우치며 날로 모든 선을 행함을 이름이요, 이참이라 함은 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망상을 제거해감을 이름이니 사람이 영원히 죄악을 벗어나고자 할진대 마땅히 이를 쌍수 하여 밖으로 모든 선업을 계속 수행하는 동시에 안으로 자신의 탐진치를 제거할지니라. 이같이 한즉 저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냉수도 많이 붓고 밑에서 타는 불도 꺼버림과 같아서 아무리 백천겁에 쌓이고 쌓인 죄업일지라도 곧 청정해지나니라”(《정전》 참회문). 또 소태산은 진정한 의미의 참회는 모든 죄업을 마친 경지인 불조의 참회라 지적하여 마땅히 이 지경에 이르기를 권하고 있다.
“공부인이 성심으로 참회 수도하여 적적성성한 자성불을 깨쳐 마음의 자유를 얻고 보면 천업(天業)을 임의로 하고 생사를 자유로 하여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사랑할 것도 없어서 삼계(三界) 육도(六道)가 평등일미(平等一味)요 동정역순(動靜逆順)이 무비삼매(無非三昧)라 이러한 사람은 천만죄고가 더운물에 얼음 녹듯하여 고도 고가 아니요 죄도 죄가 아니며 항상 자성의 혜광이 발하여 진대지가 이 도량이요 진대지가 이 정토라 내외중간에 털끝 만한 죄상(罪相)도 찾아볼 수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불조의 참회요 대승의 참회라 이 지경에 이르러야 가히 죄업을 마쳤다 하리라”(《정전》 참회문).
근래에 자칭 도인의 무리가 출현하여 무애행(無챗行)을 한다고 불문을 더럽히며 죄를 짓는 것을 소태산은 경계하고 있으며 공부를 잘하여 삼대력(三大力)을 얻은 도인도 정업(定業)은 면치 못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삼십계문 중에서 제일 마지막 계문이 탐・진・치 삼독심이다. 탐・진・치만 항복받으면 곧 법강항마위의 도인이 되는 것이다. 27가지 계문을 잘 지키는 사람도 탐・진・치가 남아 있으면 도로 범과할 우려가 있고, 탐・진・치가 없으면 27가지 계문도 자연히 잘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元益善〉



